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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동기회


전국 | 내 자식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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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Zenia 작성일2024-08-14 20:59 조회1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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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엘리트바둑이 서서 / 정희성​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나는 숲을 찾는다숲에 가서나무와 풀잎의 말을 듣는다무언가 수런대는 그들의 목소리를알 수 없어도나는 그들의 은유(隱喩)를 이해할 것 같다.이슬 속에 지는 달과그들의 신화를,이슬 속에 뜨는 해와그들의 역사를,그들의 신선한 의인법을 나는 알 것 같다그러나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인간이기에,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나는 울면서 두려워하면서 한없이한없이 여기 서 있다우리들의 운명을 이끄는뜨겁고 눈물겨운 여유를 찾아여기 숲속에 서서​​지금도 짝사랑 / 정희성​사람을 사랑하면임금은 못 되어도歌客은 된다.​사람을 몹시 사랑하면천지간에 딱 한 사랑이면詩人은 못 되어도저 거리만큼의 햇살은 된다,가까이 못 가고그만큼 떨어져그대 뒷덜미 쪽으로간신히 기울다 가는​가을 저녁볕이여!내 젊은 날 먹먹한 시절의깊은 눈이여!​​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엘리트바둑이 일남이와 마주앉으면 저녁 먹으라고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마땅히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앉혔다.​열 판이면 열 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갔다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남들이 늘 하는대로 따먹은 象이나 馬 따위를 딸그락거리며,​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정희성 시집 2008​*****************************************​시인은 이렇듯 재미와 엘리트바둑이 의미를 동반하여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시를 즐겨 쓰곤 한다. 오늘날엔 대표적인 두뇌스포츠로 자리 잡은 바둑이 예전엔 장기와 더불어 잡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에게도 공부에 방해될 것이란 염려 때문에 장기와 바둑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바둑은 장기와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아왔다. 옛날 객주방에서 한 나그네가 초면의 동숙자에게“바둑 한 판 두시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그가 못 둔다고 하니 “그럼 장기는 어떤가?”라고 되물었다. ​그것도 못 배웠다는 대꾸에 “에이, 오목이나 둬!”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렇듯 바둑은 점잖은 사람들의 놀이로 장기에 비하여 윗길로 쳤다.​바둑은 중국의 고대 농경사회에서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한 도구로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밖에 여러 기원설이 존재하나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2천여년 전 중국의 문헌에 바둑을 언급하고 있어 엘리트바둑이 바둑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등 기록을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이 보급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고려에 와서는 바둑 잘 두는 사람을 ‘國手’라고 하였다. 그 국수 이야기에 즈음하면 조부보다 4살 아래인 1895년생 종조부 권병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서 자주 종조부의 출중함을 들어왔기 때문이다.내 자식 대를 포함해 몇 대에 걸쳐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그만큼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가문이란 뜻일 수도 있겠다. 10여 년 전 “일제시대 老國手였던 권병욱 권재형 두 고수가 ​맞겨룬 실전 기보가 발굴됐다”는 뉴스기사가 조선일보에 게재되어 화제가 될 정도로 권병욱은 바둑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 기보의 출전은 일본 엘리트바둑이 바둑 전문지 1940년 3월호 특집에서였는데, 일본의 바둑 史家 오시마가 이 사료를 발견, 국내 바둑계에 알려옴으로써 빛을 보게 됐다. 신문에는 “대국자 두 사람은 1945년 해방이전 조선 바둑을 대표했던 국수급 강호 10여명에 포함되는 강자들”이라고 소개했다. 권병욱은 1930년대 조선기원 소속 유급 담임기사이면서, ‘운심각 주인雲深閣主人’이란 필명으로 매일신보에 바둑칼럼을 연재했던 바둑전문 기자였다. ​권재형은 1938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제2회 조선 선수권전서 우승하는 등 당시 일제 치하에서 조선 최고수 중 한 명으로 활동했었다. 바둑 인물사에 정통한 권경언 6단은 “1930년대 후기 조선 국수급 대국 기보는 국내신문엔 여러 번 발표됐지만 일본 권위지에 유명 평론가의 손으로 방대한 해설이 실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기보를 검토한 최규병 9단이 내린 대국자들의 실력은 현재 기력으로 아마 엘리트바둑이 6단 정도의 수준이지만 전투 일변도의 바둑이 흥미로웠다고 평했다. 작은 할아버지 이야기 가운데 1987년 7월호에 게재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1944년 기다니 8단이 경성을 방문했을 때 국내 바둑계에서는 조선기원, 철도국, 은행집회소, 저명인사 저택 등 여러곳에서 환영모임을 가졌다. 은행집회소에서 바둑모임이 있던 날 조선국수들이 木谷에게 두점을 놓고 연속패퇴하자 구경하던 權秉郁국수가 분연히 내가 한판 두어 보겠다고 나섰다. 이때 주위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일본인에게 자꾸 지기만 하니까 창피하다. 석점으로라도 한번 이겨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權에게 석점을 놓으라고 권했다.” “이에 權국수는 아주 불만스런 표정이었으나 주위의 강권에 의해 석점으로 대국했는데, 그 대국은 木谷 8단이 장고를 하여 약 3시간이 소요되었다. 권국수는 매 점마다 노타임이었고 시간은 木谷 혼자서 썼다. 권국수의 압승이 예상되는 판국이었으나 종반의 엘리트바둑이 사소한 패싸움 중 한 수 삐끗하는 바람에 권의 불계패로 끝났다. 권국수는 그로부터 몇 달 후 지병인 중이염이 악화되어 별세했는데, 세상에는 권국수가 목곡8단에게 지고는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노사초를 비롯한 국수들이 판판이 깨지자 숙조부께서 분연히 나섰으나 작은 실수로 패했으니 화병이 날만했다. 그 한판은 훗날 ‘시간제한’제도가 도입된 계기가 되었다. 신교육을 받았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독립운동 아니면 친일, ​그도 아니면 농사밖에 할 게 없는 시대에 바둑을 두며 탈속의 한 방편으로 전국을 유랑했던 숙조부였다. 국수에 대한 사회적 예우는 상당했다. 사랑에 모시고는 며칠이고 극진히 대접했고 떠날 때는 노잣돈을 건넸다. 조선 국수의 1인자 노사초와 원산에서 내기바둑을 두어 거금을 딴 일도 있다. 궁인 아내를 맞고 미국유학을 다녀온 대단한 신여성과 사랑에 엘리트바둑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한 혈육인 따님은 신학교를 나와 개척교회 등지에서 평생 독신으로 목회활동을 하다가 몇 년 전 별세해 ​안타깝게도 후손은 없다. 바둑은 오랫동안 엘리트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餘技의 수단이었다. 교양인이라면 갖추어야 될 4가지 덕목을 지칭하는 ‘琴棋書畵’라는 말이 있다. ​‘금’은 거문고, ‘기’는 바둑, ‘서’는 글씨, ‘화’는 그림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사대부들은 바둑을 필수교양의 하나로 여겼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발동해 바둑판을 뒤집거나 공중으로 날리는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작은할아버지처럼 그렇게 화병으로 세상과 하직할 수 있는 ‘위험한’ 게임이기도 하다. 이세돌이 이번 3.1절 100주년 특별대국에서 커제에게 진 뒤 ​은퇴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은퇴는 언젠가 하겠지만 패배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길 바란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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