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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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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과연 달라졌는가? 이 질문은 분명 엉뚱해 보인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와 경제건설, 민주화와 권위주의의 청산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현대사를 되짚어보면 달라져도 정말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상응하는 의식의 발전이 이루어졌는지는 미지수다. 외형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분명 우리사회는 1987년 이후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목격하였다. 직접선거는 일반화되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적인 환경에 상응하는 민주주의적인 의식은 아직 저발전 상태인 것 같다. 우리사회의 평균적 의식은 아직도 봉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요즘의 세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분별력을 갖추고 있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지난주 대통령은 민주평통 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에서 무려 70분에 걸쳐 하고싶은 말들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황색언론은 '갈 데까지 가버린 대통령', '안타까운 자기 부정'등의 제목으로 공격하고 기사 하단에는 익명성의 방패뒤에 숨어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어지러운 댓글이 달린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사의 수준에 딱맞는 댓글이다. 분별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다지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두 그를 '개 취급'하니 한번 대통령을 옹호해보자. 그는 누구인가? 우리의 헌정 역사상 가장 무시당하는 대통령이다. 그는 오로지 민심만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 그 민심에 의해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이른바 학벌 좋고 배경 좋은 정치꾼들에게 그는 그야말로 '굴러온 돌'에 불과했다. 그의 운명은 취임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대통령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으며, 일을 할 수 없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손발을 묶어버렸다. 이런 가운데 일을 잘 할 수는 없다. 버티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확실히 '왕이 된 쌍놈'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일국의 대통령(왕)이 입을 그리 놀려서야...", "무슨 대통령(왕)이 이리 무게가 없이..." 등의 대중적인 언설들은 그를 민주주의의 대통령이 아닌 전제주의의 왕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보통 왕이 아니다. 알고 보면 그는 '쌍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도 '죽이네, 살리네' 말이 많은 것이다. 간추리면 사람들의 머릿속은 '대통령은 왕이다' '쌍놈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온갖 봉건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사회의 평균적 의식이 드러난다. 우리사회의 의식은 아직도 민주주의적인 합리성에 다다르지 못한 채 봉건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의 정치를 통해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비판 받을 만한 대통령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의 실정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비판은 분별력을 갖춘 비판이어야 한다. 대통령 역시 말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 자리에 왕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는 무분별한 생각을 하는 한 이 나라는 여전히 봉건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 분별력을 갖자. 이성을 잃은 비판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나라를 쓰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