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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000 작성일2006-10-27 00:00 조회10,464회 댓글0건본문
시인 등단한 '만화가게 아저씨' 노민환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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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야, 시(詩)와 함께 놀거라" 중공업 과장에서 만화가게 주인 그리고 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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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민 기자 lcm@domin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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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입사했을 때였습니다.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제가 일하는 곳을 찾아왔죠. 그때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변변한 편의시설도 없이 눈만 뜨면 공장 짓는 일에 매달리던 때였으니까요. 그때 아버지가 새카맣게 탄 제 모습을 보고 그냥 집에 가자고 하더군요. 다른 직장을 알아 보시기도 했을 겁니다. 그때 저는 하는데까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일이 즐겁기도 했습니다. 같이 들어온 동기생들도 고생하는데 저 혼자만 힘들다고 빠지기도 싫었고요." 1996년 2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직장을 나올때 가졌던 직함은 '자재 과장'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학창시절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함양)에 들어가 사슴농장을 하면서 시 공부를 할 생각이었어요.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렸죠." 만화가게를 시작한 지는 3년 6개월 쯤 되었다. 96년에서 2003년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공백으로 남는다. "주식 하다가 손해도 좀 보고,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관리사로 일하기도 했죠. 잘 안되더라고요." 만화가게를 인수하고부터 본격적인 시공부를 할 수 있었다. 자유문예 잡지에 <눈물보따리>로 시인 등단
노 씨는 삼성중공업 재직 시설 사내 잡지에 수많은 글을 실었다. 시 뿐 아니라 콩트나 수필 등도 창작했다.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스크랩해 보관하고 있었다. 노 씨가 내놓은 스크랩 북들을 뒤적이다가, 만화가 이희재 관련 자료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유를 묻기 전에 노 씨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만화가 이희재가 제 매제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만화가게 이름이 '악동이 만화방'이었다. 만화가게 한켠에 걸려 있는 펼침막 속 캐릭터들이 왠지 눈에 익다 했더니 이희재 씨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제가 만화가게를 한다고 하니까 매제가 말리더라고요. 요즘 만화방이 어디 잘 되겠냐고 하면서요. 그래도 막상 가게 문을 열고 나니까 홍보형 대형 걸개 그림까지 보냈더라고요. 지하로 가게를 옮기는 바람에 그 걸개 그림을 걸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노 씨는 지금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을 글쓰기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 어릴 적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내 '시어'를 만들다보면 시름도 어느새 가신다. 일종의 집념이 느껴졌다. 밤 12시까지 만화가게에 있다가 내서에 있는 집으로 퇴근한다는 노 씨에게서 힘들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화가게 일을 하면서 묵묵하게 시를 써온 노 씨.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아직 첫걸음이라고 한다. "지금도 배우는 단계죠.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등단을 했죠. 자만하지 않고 더 노력해야죠." '삼성중공업 간부→만화가게 주인→시인'으로 이어진 노 씨의 인생 역정은, 앞으로 펼쳐질 '가지 않은 길'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 씨 자신도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입사할 때 딱 20년만 근무하자고 다짐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시간은 문학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사회 여러 방면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길들을 개척해 나가야죠." 3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악동이 만화방'에서는 140 여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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