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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우산악회


등 굽은 소나무 선산 지킨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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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산 작성일2006-09-14 00:00 조회8,3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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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나무 이름이 뭔지 아나?”
 
금오산 도립공원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 가는 길가에는
쭉 뻗은 우람한 둥치에 이등변 삼각형으로 잎을 늘어뜨린 나무들이 있다.
화가가 굵은 붓에 흙빛 물감을 듬뿍 먹여서 단번에 쭉 위로 그린 듯한 나무.
세월의 흔적인 듯 이끼까지 둘러쓰고 쭉빵으로 곧게 뻗은 나무이다.
 
“글쎄, 메타~ 뭐라던가요.”
 
“음, 메타세콰이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라는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에 심어져 있다는 바로 그 나무야.”
 
은행나무, 소철과 함께 공룡 시대의 살아있는 화석 식물이라고 한다.
몇 백m에 불과하지만 메타세콰이어 나무 그늘이 푸른 터널을 이루고
깨끗이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가 적당히 곡선을 그리는 멋진 길.
친구인 소연 아빠와 어깨를 나란히 금오산 주 등산로로 가는 중이다.
 
“참! 지갑 가져왔어요?”
 
“아니, 난 산에 올 땐 늘 빈손인데……”
 
“음, 나도 차에 두고 왔네요.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어쩐다?”
 
주로 법성사 쪽으로 올라서 이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다니므로
나는 도립공원 입장료를 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 코스로 오더라도 늘 새벽 등산만 다녔으므로 언제나 공짜였다.
오늘은 일행이 있다 보니 9시가 넘은 시간이다.
 
“외상으론 안될까? 다음에 준다는 확인서 써 주고.”
 
그런 대화를 하며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가나 어쩌나 하고 있는데
하얀 색깔의 고급 외제 승용차가 매표소 쪽에서 내려오다가 멈춘다.
차창이 스르르 내려 오더니 어느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OO 아이가?”
 
“어, 누님이 웬일인교?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라요?”
 
“응, 새벽 일찍 올랐더니.”
 
“잘 됐네요. 나 돈 좀 꿔 주이소. 지갑을 두고 와서.”
 
그녀는 옆 좌석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권 지폐를 몇 장 꺼낸다.
 
“한 장이면 되는데…….”
 
“한 장을 어떻게 주노. 남는 건 저 사장님과 점심이라도 드셔, 나중에.”
 
가만히 보니 목소리가 지극히 여성스러운 그녀가 생전 초면은 아니다.
산에서도 오르내리며 가끔씩 마주 쳤던 안면 있는 아주머니였다.
내가 뻘뻘 땀 흘리며 힘들게 오를 때 내려오면서 마주치면,
“힘 드시지요?”
웃는 얼굴로 그렇게 인사하던 바로 그 아주머니.
그녀가 손을 흔들며 가고 난 후 매표소를 거쳐 케이블카 승차장을 지나
울창한 송림을 지날 즈음, 소연 아빠가 천천히 이야길 시작했다.
 
2.
저기 잘 생긴 소나무들 보이지요?
저것들이 바로 적송입니다. 자태도 미끈하고 솔잎 모양도 근사하지요.
여긴 도립공원이니까 아무도 손을 못 대지만 보통 산에 있으면
도벌꾼들이 얼씨구나 눈독 들여서 금새 베어갑니다.
 
이 쪽의 굽은 소나무……원래 이런 나무가 오래 삽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 말도 있잖습니까.
아까 그 누님이 이런 굽은 소나무 격이라고나 할까요.
산 오르는데 심심하니 형님도 안면 있다니까 그분 이야길 좀 할게요.
 
그 누님은 몇 년 후면 지천명인데 아직 독신입니다.
그 누님, 자기 일이 너무 바빠 닥친 혼기를 그냥 보내 버렸어요.
지금은 팔순 아버지를 모시고 50평 넘는 아파트에 단둘이 삽니다.
노부께선 청각 장애인이십니다. 모친께서는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그 누님 요즘 취미는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는 겁니다.
그 여행의 대부분을 노부를 모시고 다닙니다.
그 연세에도 딸이 여행 말만 꺼내면 주저 없이 앞장을 서신답니다.
여행 사진을 몇 번 봤는데 노부의 표정이 밝고 행복해 보이더군요.
 
그 누님은 대단한 행동파이지요.
그 누님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체력 단련 삼아 등산을 자주 다녔는데
그때도 아버지를 모시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버지께서는 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하십니다.
 
1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 누님은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어요.
동네 작은 구멍가게를 하던 누님의 부모님은
막내이자 외동아들인 남동생에게 모든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딸로는 막내인 그녀에게 아무런 배려를 베풀 여유가 없었지요.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구멍가게를 꾸려가느라 늘 바빴어요.
우리가 놀러 가면 막내 동생의 친구라고 뭔가를 꼭 먹여주곤 했지요.
그 누님이 손수 만들어 주던 음식 맛이 기가 막혔는데
맛깔스런 그 솜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가 인정하던 터였지요.
 
내가 군대 제대를 하고 취직 후 결혼을 하고 그냥 저냥 사는데
오늘처럼 길에서 저 누님을 만난 거에요.
내가 근무하는 직장 근처에 요리학원을 차렸다면서 시간 나면
한번 들리라고 하더군요.
그 누님의 동생인 내 친구는 서울로 직장을 구해 갔다더군요.
 
다음 날 바로 찾아갔더니 이곳 지명을 딴 요리 학원이었어요.
이십 년 전......이곳은 요리 학원이 한군데도 없었지요.
찾아와 준 걸 고마워 하며 앞으로 점심은 그 누님이 해결해 준다고 해서
그 후 가끔 그 누님이 운영하는 요리 학원에서 점심을 먹었지요.
 
그 누님은 언니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해서 곁을 떠나자
자기는 결혼보다는 뭔가 자기 일이 하고 싶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취미인 요리 기술을 배우고자 수소문 끝에 인근의 가장 큰 도시인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학원의 원장을 찾아갔답니다.
월급은 상관없으니 잡일을 거들며 배우게 해달라고 원장에게 매달린 거죠.
 
그 누님 됨됨이를 유심히 살피던 원장이 그녀를 조수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5년.
대략의 준비와 조건이 갖추어지자 이곳에 요리 학원을 개업했어요.
학원 전세 보증금 2000만원은 대출을 얻어 해결하고
조리대며 실습 자재도 헐값에 나온 중고를 구해다 설치했답니다.
 
그 누님은 요리 학원 한 귀퉁이 골방에서 홀로 새우잠을 자며
자신과의 고독한 투쟁을 시작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시작이 초라해 보였던 누님은
이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 재산이 얼마인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에요.
 
지금은 음식점 개업이 신고제라서 서류가 까다롭지 않지만
이십 년 전 만해도 조리사 자격증 없이는 음식점 운영이 불가능했지요.
지역에 단 하나 있는 유일한 요리 학원이다 보니
취미로 요리 수업 받는 학원생 보다 음식점 개업 목적으로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았었지요.
요리 강의 실력도 출중해서 자격증 취득율이 높다 보니
그 누님이 운영하는 요리 학원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로 번창했어요.
 
음식 솜씨 좋다고 기관 단체의 출장 요리나 강의 초청도 물밀듯 들어와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이곳 저곳을 뛰어 다녔답니다.
그 누님 말을 빌리자면.......
그 당시는 자고 나면 갈고리로 돈을 끌어 모으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불과 몇 년 안되어 요리 학원 개업할 때 진 빚도 갚고
작은 아파트도 한 채 구입해 그녀 한 몸 편안히 쉴 곳도 따로 장만했지요.
그리고......그 누님은 돈이 모이는 대로 부동산을 사 모았다고 합니다.
부동산에 대한 무슨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통장의 숫자로 된 잔고 보다는 눈에 보여 내 꺼 라는 실감이 더 났기에.
 
요즘은 음식점 개업이 수월하게 바뀐 요식업 규정도 그렇고......
동종의 요리 학원도 서너 군데 더 생기고 하다 보니
학원생이 대폭 줄어들어 한가해진 지 벌써 몇 해째랍니다.
 
그래서......오히려 천만다행이라고 그 누님은 말합니다.
요리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룰 때는
누님 자신을 위하는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없었지요.
한가해진 지금, 학원 운영은 대리인을 시키고 가끔 들러 결재만 하는 정도.
 
시간이 여유로워진 순간부터 다시 못다한 공부를 시작하여
일본요리전수학교를 필두로 국내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그러한 이력으로 현재는 음식점 카운셀러를 하고 있습니다.
 
음식점 운영이 시원찮은 점주의 상담이 들어오면
현장 답사 후 인테리어에 대한 조언이나 새로운 메뉴 개발도 해주고
요리법까지 완벽하게 전수해준 후 그 대가를 받는 거지요.
수고료가 건당 대략 오백 만원 정도라니.........대단하지요.
 
그 누님은 시의 적절하게 익힌 요리 기술 하나로 끝 없는 도전을 하며
성실한 노력으로 부와 명성을 쌓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GOGO 중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여유 시간이 주어져 좋아진 게 한가지 더 있다고 합니다.
고령의 노부 곁에 함께 할 시간이 많아져서 너무 좋다는 거지요.
그 누님은 현대판 효녀 심청이 입니다.
 
오래 전 그 누님의 모친이 먼저 세상을 버리자
홀로 남은 청각 장애인 시아버지를 도저히 못 모시겠다며
외동 며느리, 그녀의 올케가 친정으로 장기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남동생의 이혼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 누님이 자청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네요.
 
곁에서 지켜본 그 누님의 아버지 섬김은 한마디로 지극 정성입니다.
그 누님이 한없이 우러러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내 친구 아버지도 막내 딸 곁의 말년이 그럴 수없이 행복한 표정입니다.
사는 게 바빠서, 하나 있는 아들이랍시고……가장 못 베푼 막내딸에게
그런 효도를 받으리라고는 아이들 키울 때는 짐작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공부 많이 시키지도 못하고 시집도 못 보낸 ‘등 굽은 소나무’ 같은 딸이
말년에 홀로 된 아버지를 이렇듯 지극 정성으로 모시다니……
과연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 말이 꼭 들어 맞는 격이지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다른 형제보다 저를 유독 사랑해 주셨어요.
아버지의 그런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저는
부모님을 위해 뭔가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요.
그런 제가 철이 들 때를 기다려주시지도 않고
부모님은 몇 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돌아가셨어요.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
그 누님은 그런 저를 자꾸 돌아보게 만듭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이런 말로 불효자인 절 눈물지게 만듭니다.
 
“아버지가 인간 수명의 한계라는 120까진 아니라도 100수만 해주신다면
든든한 남편 있고 잘난 자식 둔 여자들……하나도 안 부러워할 자신 있다.”

3.
어느 새 금오산 정상이 눈 앞이었다.
가을빛이 언뜻언뜻 비치는 해발 976m 현월봉은 휴일인지라 사람들이 많다.
많이 배운다는 것, 그게 무슨 소용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길에 혼신의 힘 다하여 살면 부끄럼 없는 한세상인 것을.
 
힘들 게 올라온 정상도 언젠가는 내려가야 하는 것.
우리네 삶도 왔다가 가는 것일진대 무엇에 그리도 연연해 할까.
하산 길 발걸음이 더 무거운 것은 나 역시 홀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고향에 홀로 사시게 하는 불효 때문일 것이다.
 
소연 아빠 친구의 누님이라는 그 여성은 얼굴이 약간 말상으로 길게 생겼다.
‘굽은 소나무’란 비유에는 여성으로서의 용모, 그런 면도 좀 반영된 것일까.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런 대단한 분은 금오산 도립공원 초입의 멋진 가로수,
1년에 1m씩 자라서 높이가 35m까지 자라고 다 자라면 지름이 2m가 넘는다는
메타세콰이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우러러 봐야 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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