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수 주교는 지난해 3월 안식년 기간에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동안 하루하루의 체험과 느낌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웃음과 감동, 진솔한 고백이 묻어나는 황 주교의 택시운전 체험기를 소개한다.
택시운전 자격증, 신규교육 수료증 등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나니 이틀 뒤부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택시회사 사무실의 과장이라는 분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 같은데, 무슨 사연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뭐 여러가지 사정으로 여태 홀아비 신세입니다"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과장은 "성당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일했던데, 혹시 신부가 되려고 했던 것 아녜요?"라고 재차 물었다. 오랫동안 성당 사무원으로 일했다고 이력서에 적어놨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그럴 생각도 없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과장은 "신부가 됐으면 좋았을 양반인데…."라며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중늙은이가 새로운 인생전선, 그것도 고달픈 택시기사로 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돌아서면서 '저 양반이 천주교 신자는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서 그 방면(신부) 냄새가 나나'하며 속으로 웃었다.
3월5일, 택시회사에 들러 간단히 인사한 뒤 사장님한테서 택시운행 전 교육을 받았다. 사장님은 60대 중반 할머니다. '운전기사들 밥해주는 할머니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모가 허름한 사장님이다.
소규모 택시회사라서 그런지 사무실과 기사대기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사장 할머니는 한쪽 구석에서 작은 이불을 깔고 발을 묻고 있었다. 의자도 없는 좁은 사무실 한쪽에서 선 채로 운행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그야말로 간단명료했다. 사장 할머니는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고 배우는 마음으로 하라"는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배우는 마음으로 하라….'
어떻게 보면 그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서두르지 않는 신중한 운전도 실상은 배우는 마음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술이나 요령보다 배우는 마음 자세가 훨씬 더 손님에게 좋은 느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내 골목 골목을 손바닥보듯하는 베테랑 기사에 비하면 나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택시를 몰고 '길을 나서는' 나는 무척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한다고 생각하니, 길을 모르는 것이야 배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한층 자신이 생겼다.
가식적 언사를 생략하고 한 마디 짧은 말로 교육을 하는 허름한 몸뻬 차림의 사장 할머니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고수였다.
뒷좌석에 타고 다니기만 하던 택시를 난생 처음 몰고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우선 아파트가 있는 용호동 메트로시티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를 다 통과하도록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용호동 쪽으로 차를 돌려 용호동 천주교 묘지 입구까지 올라가서 차를 돌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어떤 아주머니가 차를 세웠다. 순간 기쁘기도 했지만 어디로 가자고 할 지 몰라 잔뜩 긴장했다.
"광안대교로 해서 해운대시장으로 가주세요"
'휴~ 해운대. 그쪽은 내가 좀 알지.'
그런데 광안대교를 지나면서부터 걱정이 생겼다. 해운대시장이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운대 역에서 우회전해서 가는 그 길 말이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 편하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택시는 35만㎞나 운행한 오래된 차라 작동이 매끄럽지 못했다.
오후에는 부전시장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아주머니 한분을 태웠다. 양정의 어느 산비탈 동네로 가자고 했다. 한참을 가는데 아주머니가 뒤에서 "아저씨, 요금단추 안 눌러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목적지를 생각하느라 주행버튼 누르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아차 싶어 그제서야 주행버튼을 눌렀다.
주행 요금은 1800원. 2000원을 받아 거스름돈 200원을 내줬더니 아주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갔다. '나라면 거스름돈은 못 받을 것 같은데….'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냉엄한 생존경쟁의 세상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택시를 운전한 지 이틀째다.]
마음이 덜 초조한 게 약간 여유가 생긴 듯하다. 운전대를 처음 잡은 어제는 승객이 낯선 곳으로 가자고 할 때 정말 난감했다. 승객이 택시에 오르자마자 길부터 묻는 게 택시기사로서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오늘은 배짱도 약간 생기는 것 같았다.
서대신동 부근에서 가방을 든 아주머니가 택시를 세웠다. 초량 샛길로 해서 아미동 산복도로 윗쪽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초량 샛길을 몰라서 한참을 가다가 말했다.
"초량 샛길쪽으로 빠질 때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그 부근을 잘 몰라서요."
"택시운전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보십니까?"
"아저씨는 아직 때가 안 묻은 것 같아서요."
그 말은 아마도 택시기사로서 관록이 붙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날 비로소 한가지 의문에 실마리가 풀렸다. 처음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 기사들에게 "초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했는데 다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새 동료가 왔는데 왜 그렇게 냉담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아직 택시기사로서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들과 어려움과 기쁨을 공유하기까지는 말없이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신앙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당장 예수님과 친교 속에서 하루하루 평화롭게 살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막상 영세 뒤에는 교리실에서 만났던 사제와 수녀조차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고, 영적 갈증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앙의 삶에도 묵묵히 견뎌내는 과정의 시간이 있다. '예수님의 때'가 묻기 위해서는 십자가 의미를 공유하는 삶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가장 어려웠던 점]
"택시운전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사람들은 길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기 전에 부산시내 지도책을 펴놓고 지리공부를 하기도 했다. 큰 길만 알고 있던 나는 지름길과 연결 샛길이 그토록 많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운행 3일째 되는 날 한계에 부닥쳤다. 내 길눈으로는 택시운전해서 밥먹고 살기 힘들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택시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많은 샛길과 골목을 어떻게 다 익힌단 말인가. 그래, 바로 이거다. 손님들에게 초보임을 솔직히 밝히고 길을 가르쳐달라고 양해를 구하자.'
이날부터 조금이라도 애매한 곳이다 싶으면 불필요한 자존심을 다 버리고 무조건 "죄송합니다. 길을 확실히 몰라서…"라며 길을 물었다. 손님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줬다. 어떤 손님은 내리면서 "앞으로 손님들이 ○○가자고 하면 저 큰 건물 앞에서 무조건 우회전하면 돼요"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문제는 초보이면서도 초보임을 정직하게 말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이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바로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식당 아주머니의 향기]
저녁 9시30분. 12시간 가까이 운전해 피곤한 터라 회사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차를 세웠다. 손님과 말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아무 말 없이 기계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한참을 가는데 아주머니가 입을 뗐다.
"아이고, 기사님, 제한테서 음식냄새 많이 나죠?"
"(반찬냄새가 좀 나기는 했다) 아닙니다. 냄새는 뭐."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 주방에서 일하다보니 이 냄새를 어쩔 수가 없네요."
아주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는 불쾌한 냄새가 아니라 하루종일 열심히 일한 사람의 좋은 향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승객마다 냄새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은은한 향수 냄새에서부터 생선 냄새, 소주 냄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술냄새 풀풀 나는 손님을 태우고 가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 모든 냄새는 겉에서 나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향기는 내면에서 난다.
[길에서 길을 잃다]
밤 12시가 넘으면 도시의 골목은 정적에 휩싸인다. 한낮 소음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가로등만이 어두운 골목에서 깜빡깜빡 졸고 있다.
택시기사 입장에서 이 시간대에 가장 '물 좋은' 곳은 교차로 부근 유흥가다. 연산 교차로 뒷길 주점 앞에서 젊은 여성을 태웠다. 명장동 어느 곳을 가자고 하길래 순간 당황했다. 그쪽 방면은 영 자신이 없었다.
그 여성의 퉁명스런 안내를 받아가며 목적지에 겨우 닿았다. 차량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주택가 깊숙한 골목에서 택시를 멈췄다. 여성은 요금을 낸 뒤 택시 문을 세차게 닫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 저기,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
새벽 1시, 낯선 골목.
'이 좁은 데서 어떻게 차를 돌려 나가야 하나? 또 여기는 어디 쯤인가?'
난감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둔 골목에 갇혀 한동안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겨우 '출구'를 찾아 큰길로 빠져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이처럼 낯선 길에 혼자 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한다.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런 순간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지 않는가.
[손님이 돈으로 보였나]
오늘은 회사에 내야 하는 돈(사납금)보다 많이 벌었다.
아침 일찍부터 작정하고 운전대를 잡은 덕분이다. 체험이기는 하지만 택시기사가 된 이상 사납금은 채워야 하는 게 기본 아닌가.
하루를 정리하며 오늘 내 택시에 오른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학교에 늦었다고 재촉하는 고등학생, 근심어린 얼굴로 경찰서에 가자고 했던 아주머니, 대낮부터 술냄새 풀풀 풍기던 아저씨, 아이들 데리고 병원가는 아주머니, 기름냄새 나는 정비소 아저씨….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 이렇다 할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이토록 떠오르는 게 없을까.
그 이유는 돈 벌려는(?) 욕심에서 그들을 승객으로만 대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늘 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그들의 삶과 인생까지는 만나지 못했다. 돈을 벌려고 작정하니까 사람이 돈으로 보인 것 같다.
관점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시인은 우리가 평범하게 보아 넘기는 꽃 한송이, 구름 한 점에서 아름다운 시어를 이끌어낸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 택시비 깎아드릴께요 ]
밤 9시쯤, 작업복 차림의 아저씨가 택시에 올랐다. 용호동으로 가자고 하는 그에게 "퇴근하시나보죠?"하며 말을 걸었다.
막노동으로 먹고 산다는 그는 평소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는데 오늘은 술 약속이 있어서 오토바이를 아예 집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그가 겸연쩍은 얼굴로 물었다.
"용호동까지 요금이 얼마나 나올까요?"
"글쎄요, 4~5000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더 나올 것 같은데. 아무튼 수중에 8500원밖에 없거든요. 미터기가 8500원까지 올라가면 거기서 내려 주세요."
"하하, 그보다 더 나오면 깎아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교통체증 탓에 용호동 입구에서 이미 5200원이 넘어섰다. 난 수중에 있는 돈만큼 타고 가려는 아저씨의 촌스런(?) 마음에 반했다. 그래서 "손님한테는 특별히 5000원만 받을 테니 걱정말고 앉아 계세요"라며 미터기를 꺼버렸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러면 경우가 아니니 저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그는 내리면서 6000원을 떠맡기듯 건넸다.
"아저씨, 미터기로 해도 이렇게 안 나와요. 1000원은 도로 갖고 가세요."
"아닙니다. 6000원은 충분히 나오죠. 택시운전해서 얼마나 번다고 요금을 깎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몇 번씩 숙이면서 인사를 한 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쌓인 피로가 눈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 양반은 어디서 저토록 선한 마음을 수양했을까?'
순수하고 정직한 우리 이웃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전 세계가 알아준다. 머리 좋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만큼 선한 마음과 바른 자세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삶의 자세나 정신 수양과는 동떨어진 지식위주 교육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행복한 아주머니]
중년 여성을 태웠다. 조금 가다보니 두 사람이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세우려고 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뒷좌석 아주머니가 "난 조금 더 가면 되니까 저 사람들을 태우시죠"하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는 앞좌석으로 옮겨타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조금 더 가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는 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나는 고마운 마음이 들어 1000원만 내라고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2000원을 내고 거스름돈도 사양했다.
택시운전도 치열한 경쟁업종이다. 승객을 먼저 발견하고,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면 한치 양보없이 차를 몰아야 한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1초라도 뒤지면 손해'라는 냉엄한 현실이다. 경쟁에 밀리지 않으려면 내 위주로 생각하고, 내 위주로 차선을 잡아야 한다.
오늘 도심에서 치열한 생존경쟁 체험을 하는 동안 그 아주머니를 여러 번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길만이 아니라 남의 길도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을 갖고 살면 세상 어떤 독으로부터도 해를 입지 않는다(마르 16, 1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는 믿음이 약하기에 세상 독에 너무 쉽게 해를 입는다. 미움의 독, 허영의 독, 자만심의 독… 모두 자신의 길만 고집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잃는다. 또 그 때문에 고독해진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그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시선'으로 살다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의 삶'을 믿는 것이다.
사랑의 삶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세상 온갖 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그 아주머니는 독에 해를 입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분 같다.
(읽어 좋은글이기에 퍼 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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